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털링 모스 (문단 편집) == 레이싱 커리어 == [[1948년]], 자동차 경주에 참가하고 싶었던 모스는 경주용 자동차였던 쿠퍼 500을 사고 싶었다. 그러나 아버지인 알프레드는 아들이 [[카레이서]]처럼 위험한 직업이 아닌 자기와 같이 [[치과의사]]처럼 안정된 직장을 구하길 바래서 아들의 이런 말에 극구 반대했다. 하지만 그는 여러 대회에 참가해서 받은 상금을 [[비상금]]으로 꼬박꼬박 저축했고, 결국 아버지를 설득하는 데 성공해 첫 레이스카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모스는 아버지의 불안과는 달리 데뷔 첫 해부터 눈부시게 활약했다. 국내·국제 대회에 가리지 않고 승리를 이어갔고 [[포뮬러 3]]에도 참가했으며, 1950년엔 재규어 XK120을 빌려 타고 1950 RAC 투어리스트 트로피에 나가 우승하기도 했다.[* 그 날은 마침 모스의 21번째 생일이었다.] 그리고 1951년에는 HW 레이싱에 입단하여 처음으로 [[포뮬러 원|F1]]에 발을 디뎠다. 물론 1955년에 메르세데스와 계약하기 전까지는 기량이 바닥이었다. [[1953년]] 메르세데스 팀의 감독 알프레드 노이바워(Alfred Neubauer)는 모스의 매니저 켄 그레고리와 모스가 메르세데스 그랑프리 팀에 합류할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비교적 경쟁력 없는 차를 탔음에도 그가 잘 하는 것을 보고, 그리고 그가 더 나은 차 안에서 어떤 경기를 보여줄 것인지를 보고 싶어했던 네우바우어는 모스에게 일단 1954년 시즌에서 쓰일 [[마세라티]] 팀의 레이스카를 사라고 제안했고[* 이때는 벤츠가 레이스카를 못 만들어서 [[지곤조기]]를 시전했었다. 물론 차를 못 받은 건 판지오도 마찬가지.], 이를 들은 모스는 마세라티 250F를 구매해서 마세라티 팀으로 출전했다. 다만 차량 성능이 개판이라 챔피언십에서 높은 점수를 차지하진 못했지만, 그는 메르세데스의 레이서들과 함께 여러 번 동등한 경쟁을 했었고 또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몬차 서킷]]에서 열린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 그는 그 당시 포뮬러 원 최고의 카레이서로 여겨졌던 [[후안 마누엘 판지오|판지오]]와 [[알베르토 아스카리|아스카리]]를 모두 제치고 선두에 올라갔다. 아스카리는 엔진 문제로 리타이어, 모스 역시 엔진블로우가 걸릴 때까지 68바퀴를 선두로 달렸다. 그러나 결국 판지오가 막판에 승리를 가져갔지만 모스는 손으로 차를 밀어서 어떻게든 결승선까지 데리고 갔다. 이런 모스가 [[호켄하임링]]에서 W196의 주행 테스트를 받으러 왔을 때 이미 이전 경기에서 여러번 좋은 인상을 받았던 노이바워는 1955년에 모스와 계약을 했다. || [[파일:external/www.turkiyef1.com/juan-manuel-fangio-mega-galeri-11.jpg|width=510]] || || 판지오와 모스의 차량. 맨 앞에 은색으로 반짝거리는 차량들이다. || 1955년, 모스는 영국 리버풀 북부에 위치한 에인트리에서 열린 1955년 영국 그랑프리에서 첫 우승을 만끽했다. 영국인 최초의 우승이자 라이벌인 판지오를 처음으로 꺾은 대회였다. 그들은 막역한 친구 사이였는데, 당시 판지오가 모스의 홈그라운드 우승을 위해 1위를 양보했다는 의견도 있었다. 모스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판지오는 “그 날은 나보다 모스가 위대했다”고 말한다. 이후 모스는 1957년까지 낫소 컵과 타르가 플로리오, 그리고 밀레 밀리아[* 10시간 7분 48초로 [[https://en.wikipedia.org/wiki/1955_Mille_Miglia#Official_Results|전체 성적 '''1위.''']] 그리고 이 때의 출전번호 772번은 지금도 스털링 모스의 상징이 되어 [[메르세데스-벤츠 SLR 맥라렌]]의 한정판 이름으로 정해지는 영광을 얻었다.]에 출전하기 위해 잠시 빠져나왔지만 같은 해인 1957년에 다시 팀에 복귀, [[페스카라 서킷]]에서 열린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 1등을 차지해 당대 최강의 레이서가 되었다. [[1958년]]엔 F1 규정에 일대 변화가 생겼는데, '''레이스카가 드디어 엔진을 시트 뒷편에 얹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다른 양산차들처럼 앞에다가 놨다. 당연하지만 충돌사고라도 나면 매우 위험했다.] 그 중 포르투갈 그랑프리는 모스의 [[스포츠맨십]]이 빛났던 대회. 또 다른 라이벌인 [[마이크 호손]]은 경기 중반 [[스핀]]을 하고 만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시작했다. 스핀 이후 방향감각을 잃은 호손이 반대방향으로 질주한 것이다. 뒤늦게 발견한 모스는 호손의 차를 막으며 반대로 돌리라고 소리쳤다. 결국 차를 돌린 호손은 준우승을 차지하며 11R까지 챔피언십을 마친 후 모스를 1점차로 넘어서며 챔피언십 타이틀을 따낸 반면, 모스는 이번에도 챔피언을 따내지 못하였다. 1960년 모스는 [[로터스 F1 팀|로터스]]로 이적, 초기에는 쿠퍼 T51을 타다가 후반부에는 로터스 18을 타고 경기에 임했다. 그러나 모스는 같은 해 벨기에 그랑프리에서 사고를 당하며 3경기 동안 출장 금지 처분을 받았다. 그래도 시즌 마지막 대회인 미국 그랑프리에서 우승하며 유종의 미를 거두긴 했지만. 1961년, [[F1 레이스 카]]들은 모두 1.5리터 엔진을 장착하게 되었다. 그 중 페라리는 156에 강력한 V6 엔진을 얹어서 출력 면에서 강화되었지만, 모스의 로터스는 상대적으로 출력이 떨어졌다. 하지만 그는 출력이 성적을 가져다 주는 건 아니라면서 모나코와 독일 그랑프리에서 페라리를 압도하며 승리했다. 모스가 이긴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빼어난 스킬, 다른 하나는 '로터스의 핸들링'이다. 당시 로터스의 엔지니어인 콜린 채프먼은 독특하고 개혁적인 사람으로 이름을 알렸는데, 채프먼은 성능에 미치는 자동차의 디자인을 이해한 최초의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차체는 가볍고 단단해야 하지만 하체는 도로에 맞게 부드럽고 최적화 되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는 페라리와 마세라티 등 경쟁자들이 쓰는 전통적인 구조와 상충된다. 그 결과 로터스는 엔진의 성능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민첩한 코너링 실력을 발휘했다. 또한, 모나코와 독일의 경기장은 긴 직선보단 짧은 코너가 즐비했다. 로터스에게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이던 시즌이었으나, '''모스는 이번에도 챔프가 되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